재벌 총수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족할 만한 추가 투자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음으로써, 지난 7월 관세 협상의 세부 내용을 결정하는 후속 논의에서 우리 정부의 협상력을 끌어올리는 데 보탬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재용 회장과 최태원 회장은 추가 투자 발표와 함께 반도체 관세, 보조금 등에서 미국 측과 협상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정의선 회장과 구광모 회장은 관세 적용 시점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혜택 유지 등에 초점을 맞출 공산이 커 보인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이날(현지시각)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발표될 국내 기업의 미국 투자 규모는 약 1500억 달러(약 209조 원)에 이르고, 이 가운데 삼성그룹·SK그룹·현대차그룹·LG그룹 등 4대 그룹만 약 126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도체부터 배터리·조선·자동차·원전·전력·바이오·에너지까지 전방위 투자 발표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업 총수들과 만나 미국 투자 전략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는 한미 정상회담의 성공 여부가 기업들의 투자 계획에 달려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우리 정부에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펀드 외에 기업들의 직접 투자액을 늘릴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24일 미국으로 출국하며 “이번 정상회담 성공은 대단히 중요하다”며 “민관이 힘을 합쳐 정상회담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재용 최태원, 미국 반도체 투자 확대할까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미국 반도체 생산 거점 확대를 위해 텍사스주 오스틴과 테일러에 370억 달러(약 54조 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한다는 계획을 앞서 발표했다.
하지만 최근 테슬라, 애플 등 미국 빅테크로부터 잇달아 대규모 파운드리 수주를 따낸 만큼, 투자 확대가 이뤄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재용 회장은 미국 투자를 기존 370억 달러에서 450억 달러까지 늘리고,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추가로 짓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최근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에 미국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보조금을 주는 대신 회사 지분을 요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 만큼, 지분 요구에 응하기보다 추가 투자로 대응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추가 투자를 하는 기업에는 지분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또 한국 정부가 제안한 미국의 조선업 부활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에 삼성중공업이 참여하는 방안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미국 출장에는 최성안 삼성중공업 부회장도 함께 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반도체와 에너지 분야에서 130억 달러(약 18조 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는 38억7천만 달러(5조2천억 원)를 들여 인디애나주에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공장을 짓겠다고 예고했는데, 최근 미국 내 AI 반도체 수요 급증에 따라 추가 투자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SK온은 이미 미국에서 단독 공장인 SK배터리아메리카(SKBA) 2곳을 운영하고 있으며, 포드와 합작공장인 블루오벌SK(BOSK)도 가동하고 있다. 다만 최근 SK온의 재무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추가 투자 발표 가능성은 제한적일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SKE&S의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 참여 가능성이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다.

▲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두 번째)이 2025년 3월24일(현지시각) 미국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이 주재한 발표 행사에서 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미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210억 달러(29조 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발표했다.
이는 현대차그룹의 역대 최대 대미 투자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뒤 국내 재계에서는 처음으로 투자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정 회장의 이번 미국 출장에서 대미 투자 후속 조치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 7월 한미 관세 협상으로 미국에서 자동차 관세 15%를 받게 됐다. 자동차·부품 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관세 인하 적용 시점이 확정되지 않아 수천억 원대 손실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정 회장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인하된 관세 적용 시점을 앞당기는 데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LG그룹은 향후 4년 동안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을 포함해 미국 전역에 200억 달러(약 27조 원)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기에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기존 계획보다 상향 조정된 투자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LG그룹 계열사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 지역에 7개의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세액공제(AMPC) 혜택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올해 2분기 LG에너지솔루션의 AMPC 수혜 금액은 4908억 원 규모로, 국내 배터리 3사 가운데 가장 많았다.
따라서 구 회장은 대미 투자를 통해 IRA에 부정적인 트럼프 행정부가 AMPC를 유지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며 협력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재승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한미 정상회담에 동행하는 경제사절단을 보면 반도체를 중심으로 조선, 자동차, 2차전지, 기계에 대한 구체적인 대미 투자 패키지가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며 “투자 확대로 기업들의 재무적 부담은 늘어나겠지만 미국 시장 접근성 강화, 금융 비용 절감 등은 기업에 혜택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