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명진 SK스퀘어 대표이사가 11번가 콜옵션 행사 압박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한명진 SK스퀘어 대표이사로서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FI들의 돈이 8년째 11번가에 묶여 있다는 점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콜옵션을 행사할 돈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 더 큰 문제로 여겨진다.
31일 자본시장 업계에 따르면 SK스퀘어가 조만간 11번가와 관련한 콜옵션 행사 압박을 크게 느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29일 SK온과 SK엔무브를 합병하기로 결정하면서 전환우선주 3조5880억 원을 매입해 FI들의 자금을 상환하기로 했다. SK그룹이 외부적 투자자의 자금 회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한 것인데 이 선례를 근거로 삼아 11번가에 자금을 댔던 재무적 투자자들이 SK스퀘어에 콜옵션 행사를 압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SK스퀘어의 자회사 11번가는 2018년 SK텔레콤에서 분할될 당시 특수목적법인(SPC) 나일홀딩스컨소시엄(국민연금ᐧH&Q코리아ᐧMG새마을금고)에서 5천억 원을 투자했다. 당시 인정받았던 기업가치는 2조7천억 원대다.
당시 계약에는 2023년 9월30일까지 기업공개(IPO)를 완료하지 못할 경우 컨소시엄이 SK스퀘어의 지분을 포함해 동반매각요구권(드래그얼롱)을 수 있는 조항과 그 전에 SK스퀘어가 재무적투자자 지분 18.2%를 원금에 연 3.5%를 가산해 살 수 있는 권한(콜옵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2023년 11번가의 기업공개(IPO)가 좌절되면서 상황이 반전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SK스퀘어가 콜옵션으로 재무적 투자자들의 퇴로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자본시장에서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았던 전례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SK스퀘어는 11번가 지분에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이에 자본시장에는 큰 파장이 일었다.
SK그룹이라는 대기업이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재무적 투자자의 안정적인 투자를 보장해줄 수 있는 장치를 사실상 걷어차버렸다는 비판이 쏟아져나왔다. 당시 재무적 투자자 사이에서는 돈을 댄 다른 기업이 이런 선례를 따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후 나일홀딩스컨소시엄을 대표하는 H&Q코리아가 드래그얼롱을 통해 꾸준히 SK스퀘어가 보유한 11번가 지분을 포함해 11번가 매각을 추진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티몬과 위메프 사태가 터진 데다 홈플러스와 애경산업, 발란 등 경영 위기에 처한 유통기업들이 줄줄이 매물로 나오면서 11번가 매각이 더욱 불투명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과거 조 단위가 넘었던 11번가의 기업가치는 현재 5천억~6천억 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재무적 투자자들이 돈을 회수하기 더욱 어려워진 셈이 됐다.

▲ 11번가의 기업가치는 2018년 투자 유치 당시 2조7천억 원 대로 평가됐으나 현재 시장에서는 매각희망가가 5~6천억 원 수준으로 거론된다.
문제는 SK스퀘어가 2년 전 미행사를 통보해 연기됐던 콜옵션 행사 기한이 다가온다는 점이다. 투자은행업계에 따르면 SK스퀘어는 10월부터 두 달 동안 2차 콜옵션 행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재무적 투자자 입장에서는 SK스퀘어의 콜옵션 행사가 가장 확실한 투자금 회수 방안으로 여겨진다. 특히 2018년부터 8년째 자금이 묶여있는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조속한 투자금 회수를 향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SK그룹 다른 계열사들이 재무적 투자자들의 자금 상환에 적극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 터라 더욱 기대감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재무적 투자자 시각에서 보면 SK이노베이션이 SK온과 SK엔무브의 합병 과정에서 재무적 투자자들이 보유한 전환우선주를 모두 매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SK그룹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SK온은 2023년 약 2조8천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며 재무적 투자자에게 3년 안에 상장해 투자금을 갚기로 약속했다. 재무적 투자자들은 기한 안에 기업공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SK이노베이션이 보유한 SK온 지분까지 함께 매각할 수 있는 드래그얼롱 조항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은 합병과 함께 FI가 보유한 SK온 전환우선주 지분 전량을 매입하기로 결정하며 콜옵션 시기 도래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11번가를 놓고만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은 한명진 대표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다. 향후 SK그룹의 추가 자금 조달 필요성이 존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내 자본시장의 최대 ‘큰손’ 국민연금과 SK그룹이 척지는 상황이 되는 것도 피하고 싶은 상황일 수밖에 없다.
SK그룹은 그동안 다양한 계열사를 통해 자본시장에서 약 9조 원에 이르는 자금을 유치했으며 이 중 국민연금 자금만 1조 원 이상으로 파악된다.
한명진 대표가 “11번가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고 말한 것은 그가 처한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콜옵션을 행사하려고 해도 자금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SK스퀘어가 별도기준으로 보유한 현금은 1분기 말 기준 4천억 원가량이다. 콜옵션을 행사한다면 5천억 원이 넘게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데 당장 재무구조가 허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자본시장 업계에서는 한 대표가 재무구조 악화라는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11번가 콜옵션을 행사해 재무적 투자자와 관계를 정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SK그룹 전반의 자금 조달 여력과 대외 신뢰도 유지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전해리 기자